숙련기술홍보관

이달의 기능한국인

기능한국인이란 ? 10년 이상 산업체 현장실무 숙련기술경력이 있는자로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우수숙련기술자를 대상으로 숙련기술자에 대한 국민적 인식 전환, 숙련기술자 우대 풍토 조성, 자긍심 고취에 기여하고자 고용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이 마련한 제도로 매월 1명씩 선정된다.
이왕기 대표
2015년 02월
선정호
제 96호
이름
이왕기 대표
소속
(주)대성엔지니어링
회사주소
[18632]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초록로 114
주요생산품목
반도체장비, 부품

학력사항
오산공업전문대학(現, 오산대학교)(‘82)
의정부공업고등학교(‘79)

소속업체
㈜대성엔지니어링
- 업 종 : 제조업
- 주 생산품 : 반도체장비, 부품
- 사업장 규모 : 근로자수(62명), 매출액(156억, ‘14년)
- 소 재 지 :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초록로 114

특허 및 실용실안
- 등록특허(단독 19건, 공동 1건)
제10-1372394호 “엘이디 자외선 조사장치”
제10-1268293호 “반도체 디바이스의 검사장치용 인서트”
제10-1182362호 “반도체소자 캐리어 유닛”
제10-1035886호 “분리형 브레이크 디스크 로터의 서포터 및 그 장착구조”
제10-1042912호 “반도체소자 패키지 스택용 스택보드”
제10-1059429호 “인서트 조립용 가이드 트레이 및 그를 이용한 인서트의 테스트 트레이 조립구조”
제10-1071936호 “오토컨버전식 웨이퍼 프레임 프레스 장치” 외 13건
- 등록실용신안(단독 4건)
제20-0417736호 “필터 조립시스템의 경화유닛구조” 외 3건
- 국제규격ISO인증(3건)
ISO9001품질경영시스템, ISO14001환경경영시스템, OHSAS18001안전보건경영시스템

주요경력
- ’85. 05. ~ ‘90. 03. 대일화학공업㈜/ 대리
- ’90. 04. ~ ‘95. 06. 대성엔지니어링 / 대표
- ‘95. 06. ~ 현 재 ㈜대성엔지니어링 / 대표이사
- ‘97. 08. ~ ’11. 02. 오산대학교 자동차기계설계계열 / 겸임교수

주요수상내역
- 지식경제부장관 (‘11) “중소기업 발전 유공”
- 문화체육부장관 (‘09) “국민생활체육진흥 유공”

소개
「이달의 기능한국인」아흔 여섯 번째 수상자 이왕기 대표는 25년간 반도체 설비 분야에 종사해 온 숙련기술인 CEO다.

세계 1위 반도체 강국의 숨은 주역
이왕기 대표의 ㈜대성엔지니어링은 반도체 제작 공정의 후공정 설비를 주력 생산하는 강소 기업이다. 대표 상품은 체인지 키트(Change over kit)와 UV조사기다. 둘 다 반도체 제작 공정 중 후(後)공정에 필요한 제품들로, 대성엔지니어링이 국산화에 성공하기 전에는 전량 수입에 의존해왔던 것들이다. 비싼 가격과 관리의 어려움 등 수입 설비의 한계가 있었지만, 대성엔지니어링의 기술력으로 발 빠른 대응이 가능해지면서 반도체 산업의 생산성 향상 및 원가절감에 크게 기여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국산화된 장비가 거의 없었죠. 우리는 작은 부품 하나부터 시작하여 설비 자체의 국산화에도 성공했습니다. 설비 국산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대응 속도’가 빨라지거든요. 수입 제품의 경우, 문제 발생 이후 엔지니어가 파견되기까지 길게는 한 달이 소요되지만, 국내 제품의 경우 실시간 대처가 가능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입품 대비 20-30% 저렴한 가격에 공급되지만 성능은 수입품에 뒤처지지 않는다. 모 대기업 반도체 제조 공정에 사용되는 UV조사기의 경우 90% 이상이 대성의 제품일 만큼, 대성의 기술력은 현재 업계 1위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대표는 오늘의 성공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2004년 사내 부설기술연구소를 설립하여 매년 매출액의 6%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는데, 오늘의 성과에 취해있을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적성을 찾아 공고로 진학하다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이왕기 대표는 어릴 때부터 기계를 고치고 뜯어보는 일을 좋아했다. 손재주가 좋아 마을 전자제품이나 농기구가 망가지면 수리를 부탁받곤 하시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기계’ 분야가 적성이라 확신하고 공고 진학을 희망했다. 그러나 걸림돌이 있었다. 자녀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가진 아버지와의 갈등이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제가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니라서 명문대에 진학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계가 좋았기에 이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대표는 굳은 신념으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지역 명문이던 ‘의정부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3년 뒤, 당시 법랑냄비 업계 1위였던 ‘동오실업’에 입사했다. 어린 나이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능력도 인정받았지만,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친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성과를 내는 동료가 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처음엔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들은 대학을 나왔더라고요. 내가 하는 일에 학력은 중요하지 않다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이 대표는 뒤늦게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회사 인근 오산전문대(야간)에 입학했다. 요즘처럼 출·퇴근시간이 일정치 않던 당시에 매일 퇴근 후 수원과 오산을 오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회사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도와준 회사가 너무 고마웠죠. 낮에는 남들보다 몇 배 더 열심히 일하고, 졸업만 하면 이 은혜에 꼭 보답하겠다고 늘 다짐했어요. 그런데 졸업 후 군대에 가 있는 동안 회사가 사라졌어요. 경영난으로 도산한 것이죠.”

돌아갈 직장이 사라진 막막함보다 미안함이 더 컸다. 직원 개인의 학업을 지원해주는 일을 투자라고 생각하지 못하던 시기에 여러 배려를 해 준 회사에게 보답할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기억은 배움을 희망하는 직원에게 이 대표가 아낌없이 후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다른 도전정신으로 28세에 대성엔지니어링 창업
두 번째 직장인 대일화학에 근무하던 중 이 대표는 창업을 결심한다. 이때의 나이가 스물여덟. 어린 나이에 창업을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니 다들 말렸다. 하지만 한 번 결심을 하고 나니 꺾기 쉽지 않았다. 당시 갑자기 나빠진 가정환경에 장남으로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데, 월급쟁이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한 몫 했다.

“위기상황이었죠. 사람은 대개 위기의 순간에 안정을 찾지만, 저는 지금이 바로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농사짓던 아버지 소유의 농토를 담보로 대출받은 2천만 원이 자본의 전부였다. 창업자금으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었다. 설계 위주의 회사를 차리는 데 꼭 필요한 컴퓨터와 오토캐드와 같은 설계 프로그램을 장만하는데 자본의 절반인 천만 원을 써버렸다. 남은 돈 천만 원은 사무실 보증금으로 냈다. 이 대표와 경리 직원, 그리고 설계 직원 둘. 자본금 2천만 원에 유보자금 0원, 네 명의 직원으로 차린 회사가 현재 62명의 직원이 연 매출 156억(14년 기준)원을 올리는 ㈜대성엔지니어링의 시작이다.
IMF위기도 더 큰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97년 한국 사회를 강타한 IMF에 대기업도 하루가 다르게 주저앉았다. 모두 기업이 긴축재정으로 운영되자 수주량도 크게 줄었다. 하지만 90년 창립 이래 꾸준히 흑자를 기록하고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거나 성공에 취해 한 눈 팔지 않은 덕에 유보자금이 꽤 쌓여있었다. 직원들을 대량 해고하며 위기를 극복하던 여타 회사들과 달리 우리는 버틸 수 있다고, 지금의 위기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였다.

“세계적인 경기의 흐름이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가 뭘 어떻게 한다고 빨리 지나갈 위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죠. 다만 수주량이 줄어드니 작업시간도 줄었고 회사도 직원들도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저는 그 시간을 직원 교육과 그간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세세히 챙기지 못했던 것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았어요.”

전 직원이 참여하는 정기 세미나를 개최하고, 매일 아침 1시간 씩 영어/중국어/일본어 교육을 실시했다. 이 대표의 투자는 틀리지 않았는지 이듬해 98년, 대성엔지니어링은 최고 수익을 달성했다.

직원 개개인의 발전이 모여 회사의 발전이 된다
이 대표가 직원을 선발할 때 학벌과 학력은 큰 고려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직원이 있다면 아낌없이 후원한다. 학기당 200만원의 등록금 지원은 물론, 학업과 직장을 병행할 수 있게 근무시간 조정 등의 편의도 제공한다. 첫 직장에서 받은 배려를, 경영인이 되어 직원들에게 그대로 베풀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으로는 드물게 MBA 진학도 지원하고 있다. 현재까지 세 명의 직원이 회사의 지원으로 MBA과정을 마쳤다.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진행되는 외국어 교육 우수성과자에게 해외박람회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전담 관리직원이 있는 사내 도서관을 운영하며 직원들의 희망도서 구입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다. 오산대학과 연계하여 재학생의 현장실습 기회를 제공하는 등 ‘일터의 배움터화’를 위한 노력은 물론이다. 이쯤 되면 2012년 매일경제·이노비즈협회 주관 ‘취업하고 싶은 기업’으로 ㈜대성엔지니어링이 선정된 것이 그저 우연만은 아니지 않을까.

이 대표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2010년, ㈜대성엔지니어링은 미래성장 동력으로 방송용 LED조명 사업에 신규 투자했다. 기존에 사용되던 ‘수은램프’를 ‘LED램프’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해 특허도 취득했다. 수은램프는 수명도 짧고 폐기에 어려움이 있어 환경 문제도 야기해왔다. 하지만 LED램프는 수은램프 대비 1/10의 전력만으로 사용이 가능하고 교체주기도 길어 환경 보호 측면에서도 효과적이다.

“회사의 발전은 혼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직원 개개인의 발전이 하나하나 모여 나타나는 결과죠. 직원에 대한 투자는 결국 회사의 미래를 위한 투자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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