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련기술홍보관

이달의 기능한국인

기능한국인이란 ? 10년 이상 산업체 현장실무 숙련기술경력이 있는자로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우수숙련기술자를 대상으로 숙련기술자에 대한 국민적 인식 전환, 숙련기술자 우대 풍토 조성, 자긍심 고취에 기여하고자 고용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이 마련한 제도로 매월 1명씩 선정된다.
이계봉
2012년 05월
선정호
제 65호
이름
이계봉
소속
서광기연㈜ 대표이사
회사주소
[50871]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하계로240번길 93-26
주요생산품목
후육관 제조 시설, 일반산업 PLANT

학력사항
경남정보대학 기계설계전공 (’80)
동아공업고등학교(‘78)

소속업체
서광기연(주) / 대표이사
- 업 종 : 제조
- 주 생산품 : 후육관 제조 시설
- 사업장 규모 : 상시 근로자수(35명), 매출액(121억), 수출액 (170만$)
- 소 재 지 : 경상남도 김해시 어방동 1061-4

특허 및 실용실안
- 특허
제10-0949240호 “후육관 자동 연속 취부기”(단독)
제10-0908426호 “후판 자동 육면 면취기”(단독)
제10-1012022호 “관단 절삭기”(단독)
제10-0954995호 “판재 곡면 성형용 프레스기의 상부펀치장치”(공동)
제10-0954993호 “판재 곡면 성형용 프레스기의 하부펀치장치”(공동)
- ISO인증
“후육관 제조설비 및 유압장치의 설계/개발, 생산 및 설치”

주요경력
- ’83. 02. ~ ‘87. 2. 삼원산업(주) / 대리
- ‘87. 06. ~ ’98. 12. 프리랜서
- ‘99. 02. ~ 현재 서광기연(주) / 대표이사

주요수상내역
- 컴퓨터응용가공산업기사 (‘79)
- 기계제도기능사 (‘77)
- 국무총리표창 (‘12) “수출부문 유공”
- 경남도지사표창 (‘12) “수출부문 유공”

소개
“여러 분야의 기계를 다뤄봤기 때문에 원리만 알면 3D로도 스케치가 가능합니다. 나름대로의 감각은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보다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 더 나은 시스템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서광기연(주) 이계봉 대표.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서광기연(주) 이계봉 대표이사를 이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선정했다.

이계봉 대표는 외국에서 수입했던 고가의 산업기계들의 원리를 재설계하여 국산화한 숙련기술인이다. 산업기계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이 그 분야에서 선진국으로 알려져 비싼 값에 수입을 해왔었다.

“대량생산체제 시스템을 추구하는 유럽과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해서는 이길 수는 없기 때문에 틈새시장을 노려야 했습니다. 대량생산체계와 다품종 소량생산도 모두 가능한 한국형 기계를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조금만 배워도 능수능란하게 기계를 다루는 손기술을 갖추고 있다는 이계봉 대표는 그러한 장점을 활용하여 한국 실정에 적합한 한국형 기계를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유럽기계의 원리를 파악해 우리 실정에 맞는 포인트를 잡아 재설계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와 수학을 좋아했다는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시간이 주어지는 대로 공부를 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당시만 해도 농번기 때는 학교를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럴 때 시간표를 보고 산수 과목이 들은 날이면 산수책만 가지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산수는 건너 띄면 안되겠다 라는 저 혼자만의 생각으로 말이죠.” 끝없는 열정과 추진력을 기반으로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그의 어린 시절로 들어가 보자.

이계봉 대표는 경남 의령군 화정면에서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전 아버지가 일본에서 철광석 사업으로 돈을 벌어 돌아오셨지만 할아버지의 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가정형편은 어려웠다.
그는 “그때 당시에는 쌀밥과 보리를 혼식하라고 권장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도시락검사를 했었는데, 저는 그런 부분에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보리가 쌀보다 많은 밥을 싸서 다녔기 때문이지요.”라며 대학교 졸업 때까지 천장이 뚫린 다락방의 추억을 덧붙였다. 한 겨울에는 입김이 나올 만큼 추워 이불로 얼굴 반을 가리고 누웠어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으로 살아온 모습을 엿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그는 중학교 때 남동생 둘과 함께 부산으로 전학을 가야만 했다. 학비는 큰 형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던 중, 시골에서 양식을 대주시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면서 이계봉 대표가 동생들의 학비를 벌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하루 빨리 돈을 벌어야 하는 이 대표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미래에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남들 같이 석사 ? 박사 공부는 할 수 없어도 기술을 배워 사업으로 성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계제도를 전공하고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현장 실습을 나가보니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느꼈다는 이 대표. “설계의 기초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현장 실습을 나가 보니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야간 전문대학에 들어가 학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공부를 더 했습니다.”

“처음 입사한 곳이 보일러 제조회사 였는데 대중탕용 온수및 증기 보일러를 제가 단독으로 설계해서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그 곳에서 2년간 근무를 하고 본격적으로 기계설계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산업기계제조 전문회사로 자리를 옮긴다. 이 시기에 압력용기와 일반 산업기계의 설계제작, 설치, 시운전 등의 업무를 직접 맡아서 했다. 그리고 28세의 어린나이에 부서장이 되었다.

“제가 부장이 되고 한 달에 10여일은 회사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때 당시 설계 실에 군용 야전침대 사달라고 해서 새벽 2~3시까지 설계를 하고 다시 업무를 시작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많은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일도 빨리 배우게 되었고, 혼자서 해쳐나갈 능력을 키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80년대는 산업화가 거세게 일기 시작한 때라 모든 산업분야가 전체적으로 호황이었다. 그러면서 LPG 사용량이 늘어났고 이와 관련한 장비의 사용량도 대폭 늘어났다. 그러나, 회사대표의 무리한 사업 확장과 방만한 경영으로 상승세의 회사는 일순간에 꺾이게 되었고, 이 대표도 한순간에 직장을 잃게 되었다.

“사실 저는 결혼하고 30대 중반 이후에 사업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축적해왔던 자료들이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88년 같이 일하던 직원 3명과 함께 작은 설계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그 때 올림픽 개막식도 보지 못하고
임대한 사무실 내부를 페인트칠을 했죠.”

이계봉 대표는 창업 4년 만에 부산 다대공단에 10억정도의 돈을 대출받아 자가 공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다 90년대 초반에 경제위기를 맞았는데, 그때 자동차 비석면 단열 가스켓(자동차 보일러용)을 개발하는 업체와 기계장치를 함께 개발해 큰 성과를 이뤄 자동차 3사에 납품하기 위해 중부지방에 신설?확장해 공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당제품의 생산설비 2개라인을 수주 받아서 일부 제품을 납품한 상태에서 부도를 맞게 되어 여러 해 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빚을 청산하는데만 20여년이 걸렸다.

이 대표가 정말 고마웠던 것은 거래처에서 이계봉 대표의 기술을 믿고 지속적으로 일을 맡겼던 일이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저를 잘 아는 중소기업에 계신 분들은 저한테 일을 많이 맡겼습니다. 그래서 차근차근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절대 무리가 가지 않도록 성능이 우수한 기계들을 제작 해왔어요.”

다시 일어선 이 대표는 99년 서광기연(주)을 창업해 유압시스템 분야의 각종 유압 프레스류들을 개발하였고, 2005년부터 개발에 착수한 후육관 제조공정 일관 설비 시스템은 2011년에는 국내 최초로 후육관 제조공정의 12개 공정에 사용되는 장비 모두를 국산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 후육관이란 두께 10~60㎜, 길이 12~ 18m, 직경 400~1600mm, 무게 20t에 달하는 강관으로 주로 대륙과 바다를 건너는 송유관, 석유 및 가스를 뽑는 시추관, 대형건축물의 기둥 등으로 쓰임

그간 후육관 제조 설비는 유럽등지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나 이는 동일한 크기의 후육관을 대량 생산하는데 적합한 설비로 다품종 소량생산에 치중하는 국내 업체에서는 여러 애로사항이 있었는데 이를 일거에 해결한 한국형 후육관 제조공정 일관 설비 시스템을 개발한 것이다.

이계봉 대표가 개발한 한국형 후육관 제조 설비는 대량생산 및 다품종소량생산도 모두 가능한 제조설비로 7~8개 국내 후육관 생산업체에 공급하여 제조설비의 제품 가격과 납기를 1/2~1/3로 줄이고 후육관 생산성도 시간당 2~3배 가량 향상시켜 국내 후육관 제조업체들의 국제경쟁력 향상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술력이 해외로 알려지면서 중동, 러시아 등에서 수출계약이 체결되는 성과를 거뒀다.

“제 꿈은 도심 빌딩에 연구소를 차리는 것입니다. 출 ? 퇴근이 편하고 쾌적한 환경 속에서 우리 직원들이 일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기술도 발전하고 우수한 인력도 계속 배출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요즘 설계분야가 3D 업종에 속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는 이계봉 대표는 그러면서도 기술자가 돈을 목표로 돈만 쫓아서는 안된다고 선을 긋는다.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계봉 대표는 “저는 돈을 목표로 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가진 기술이 사회 곳곳에 바르게 쓰이기 바랍니다. 다만 저를 포함해 저와 같이 일하는 직원들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직원들한테도 그랬습니다. 나는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무일푼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나만 잘되자고 욕심 부리지는 않겠다. 우리가 다 같이 잘 돼야 한다.”며 같이 동참한 직원들 노고에 감사해 했다. 기능한국인 수상의 영광도 그 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공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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