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사항
동국대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한국방송통신고등학교
소속업체
(주)한국몰드 / 대표이사
- 사업장 규모 : 근로자수(168명), 매출액(325억)
- 업종 : 제조업
- 주생산품 : 울산 ? 플라스틱 사출금형 / 김제 ? SMC 제품 생산
- 소재지 : 본점(울산공장) : 울산광역시 북구 매곡산업1길 21 지점(김제공장) : 전북 김제시 백산면 대동공단 2길 38
특허 및 실용실안
- 특허
제0831289호 “강화 플라스틱 성형용 금형장치 및 강화플라스틱의 성형방법”(공동)
제0980092호 “대면형 냉각 채널”(공동)
제1093516호 “자동차용 라디에이터 그릴”
제1092631호 “자동차용 라디에이터 그릴 제조방법”(공동)
주요경력
- ’82. 12 ~ ‘87. 04 (주)현대자동차 기술연구소 근무
- ’87. 03 ~ ‘98. 02 한국모델 설립 / 대표이사
- ‘98. 03 ~ 현재 (주)한국몰드로 상호변경 / 대표이사
- ‘12. 02 ~ 현재 제4대 울산무역상사협의회 / 회장
주요수상내역
- 부산지방기능경기대회 목형직종 동메달(’78)
- 백만불 수출의 탑 ’대통령상‘ (’04)
- 울산과학기술인상 (‘08)
소개
“10년 안에 세계 10대 금형전문기업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뭐 하러 그렇게 성공해야 하냐고요? 나와 함께한 직원들이 노력해서 회사의 총책임자가 되고, 새로운 주주가 되는 그런 비전과 도전에 성공하는 기쁨을 만들어 줘야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이익보다는 직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무엇일까를 늘 먼저 생각한다는 CEO. 울산광역시에 본사를 둔 플라스틱 사출금형 제작 기업 (주)한국몰드 고일주 대표의 사람 중심 경영 철학이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예순 네 번째 이 달의 기능한국인으로 고일주 대표를 선정했다. 가난했지만 늘 새로운 도전에 목말라했고, 결국 도전의 결실을 얻고야 말았던 성실함과 호기심으로 똘똘 뭉쳤던 시골소년 고일주는 이제 울산 공장과 김제 공장에 약170여명의 직원과 매출액 325억에 달하는 숙련기술인 출신의 성공한 사장님이 되었다.
고일주 대표는 경상남도 하동 출신이다. 논 다섯 마지기가 전부였던 빈농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유일한 취미는 뭔가를 깎고 만드는 일이었다. 피리를 만들고 손수레를 만들고 나무 바퀴에 철사를 두르면서 재미를 느꼈고 자신의 손재주도 자연스레 깨달았다. 부모님 일을 돕느라 공부할 시간은 부족했지만 수학만큼은 잘했던 고 대표는 결국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중학교 졸업 1년 만에 부산으로 올라와 소규모 업체인 정광목형에 취업했다.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지만 취미를 살릴 수 있는 목형 업체를 선택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신의 한수였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동생들은 제가 다 학교도 보내고 결혼도 시켜야 했죠.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면서 눈물 흘릴 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열정이 있었고 남들보다 늘 한발 앞섰죠. 지금 생각해 보면 ‘금형’은 저에게 운명이었습니다.”
먹고 살려고 뛰어들었던 ‘목형기술’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주형(鑄型)을 만들 때 사용하는 나무 모형 ‘목형’을 깎고 만들며, 실력을 인정받아 1978년 부산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3위로 입상하기도 했다.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전국대회 출전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고 대표로서는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천금 같은 기회였다. 3년간의 회사 생활과 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진로를 고민하던 그에게 현대자동차는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새롭게 디자인한 차의 모형을 만들 기능인들이 많이 필요했다. 취업에 성공한 그가 맡은 업무는 시작차(prototype car, 試作車)를 만드는 일이었다. 차의 외관부터 성능, 인체공학, 생산성 등을 검토하기 위한 차를 만들며, 그는 자동차 부품과 제작에 대한 전문 기술인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 당시 일본에서 수입하던 플라스틱 자동차 부품을 국내 제작하기 위한 사업부서가 최초로 만들어졌고, 고 대표는 플라스틱 사출금형 파트에서 일하며 기술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성실히 일하며 자기개발에 매진했던 고 대표는 어려운 도전을 결심한다.
“오래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아서 내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안정적으로 살면서 온실 속 화초가 되느니 차라리 노지에서 아무 보호 안 받고 내 스스로 살아보는 게 나 자신을 더 강하게 키우는 게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업을 결심한 그는 퇴직금 500만원으로 동료와 함께 한국모델(한국몰드 모체)를 설립한다. 1987년, 그의 나이 만 30살이었다. 한국모델은 고 대표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 모형과 플라스틱 부품 제작 등에 매진하며 10년간 견실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해나갔다. 1995년 한국모델이 현대자동차의 1차 협력업체로 등록된 후, 고대표는 본격적으로 플라스틱 사출금형 제품 생산에도 돌입했다. 대량 생산시스템에서는 ‘금형’의 품질에 따라 세계 일류 자동차가 결정될 만큼, 금형은 중요한 핵심기반기술이다. 사출금형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본 그는 미래 트렌드를 준비하는 것이 기술의 생존 경쟁력이라는 판단 아래, 동료와 회사를 분리하여 한국몰드로 상호를 변경하고 플라스틱 사출금형 전문 제조업체로 탈바꿈시켰다. 사업 초기에는 신생 업체라 마케팅에 어려움을 겪으며 고전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해답이 있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보니까 남들이 하기 어려운 것들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금형 기술은 선진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거든요. 신생 업체에서 하겠다니까 아무도 안 믿어줬어요. 하지만 연구소에서 잔뼈가 굵은 저는 자신이 있었고, 결국 성공했죠.”
한국몰드는 자동차 범퍼와 운전석 계기판 등 난이도 높은 대형 금형에서부터 라디에이터 그릴과 같은 정밀한 미세 금형까지 국내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사업실적 역시 매년 평균 20%의 높은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렇게 흔들림 없는 성공의 원동력은 사람, 바로 인재 교육이었다.
“R&D부터 품질 관리까지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나가려면 제일 중요한 게 사람이거든요”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는 고 대표는 자신과 한 배를 탄 직원들의 가치성장과 자아실현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 믿었다. 이를 위해 그는 외부 강사를 초빙, 매달 두 번씩 전 직원들이 기술경쟁력을 위한 생산과 품질관리 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다. 회사의 수익과 매출도 월별로 직원들에게 모두 오픈한다. 직원과의 소통을 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을 통한 공유의 장을 만들었고, 직원 자녀 대학등록금을 절반은 회사에서 지원하는 등 직원 복지시스템도 갖추어 일할 맛 나는 일터도 만들었다.
이런 열린 분위기 덕분인지 직원들 스스로도 실패 비용이 20만원 이상인 사항에 대해서는 모두 오픈해서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한다. 오픈 이전에는 6개월 간 6천만원에 달했던 실패 비용이 오픈 이후에는 6년간 8천만원으로 줄어들었다. 한국몰드 직원들은 마인드가 다르다. 한마디로 ‘해보자’ 마인드.
“생각의 틀을 깨는 게 우리 회사의 핵심 마인드입니다. 저는 그런 도전으로 지금까지 성공해왔고요. 그래서인지 우리 직원들도 무모할 만큼 새로운 기술에 많이 도전하고 일을 잘 저질러요. 손해를 보기도 하는데 실패해도 결국은 회사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다들 갖고 있거든요”
매년 매출의 2%를 연구 개발에 집중 투자한 결실인 필름 인서트, 히든파팅, 텐덤몰드 등 신공법 20여 가지는 ‘국내 최초, 최고 기술’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2008년에는 필름 삽입식 금형공법과 금형 내부 코팅 공법개발로 ‘울산과학기술인상(기술부문)’도 받았다. 2005년에는 복합소재 산업의 리더라는 비전을 품고 제2의 도약에 나서 전북 김제에 제2공장을 열었으며, 탄소섬유를 이용한 카본 SMC 소재, 전기버스 복합재 차체개발 및 제작에 착수했다. 2002년부터 개척에 나선 해외 시장 역시 잠재력이 많은 캄보디아, 콜롬비아, 나이지리아 등 제3국가로 다원화해 향후 매출의 60~70%까지 해외 매출비중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5년 후 울산 공장과 김제 공장이 목표로 잡은 매출은 각각 천억! 앞으로 일류 기술과 더불어 친환경 부품 개발을 통해 사회에도 적극 기여하는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고일주 대표. 마지막으로 고 대표는 기능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중학교 때 삼각함수 같이 어려운 것을 왜 배우냐고 물었다가 선생님한테 혼이 났어요. 그때 차라리 삼각함수는 다리를 건설하는데 필요하다고 동기부여 해줬다면 오히려 더 재밌게 공부했을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례히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지 ‘왜?’라는 물음표를 붙이지 않아요. 결국 그 호기심이 자신을 발전시키는 요인인데 말이죠. ‘저게 왜 그럴까?’, ‘다른 방법으로 하면 안 될까?’, 뭐든지 물음표를 자꾸 붙이다 보면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